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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_ 직접어탁의 대가 한기덕 선생 “어탁이 잊히는 것은 서운한 일, 예술로 후세에게 전수하고파”
2020년 01월 547 12908

피플

 

직접어탁의 대가 한기덕 선생


“어탁이 잊히는 것은 서운한 일,

 

예술로 후세에게 전수하고파”

 

이영규 기자

 

국내 직접어탁의 대가 하간(荷竿) 한기덕(88) 선생을 지난 11월 16일,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명인낚시터에서 만났다. 안성의 유명 유료낚시인 명인낚시터는 한기덕 선생의 외조카인 김정민 씨가 4년 전 인수해 영업 중이다.
현재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는 한기덕 선생은 외조카가 고향 합천에서 안성으로 올라온 이후 석 달에 한 번 꼴로 명인낚시터를 찾아 낚시를 즐기고 있다. 마침 명인낚시터 취재길에 한기덕 선생이 낚시를 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뵙게 됐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한기덕 선생의 어탁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한기덕 선생이 그동안 작업한 어탁들을 꺼내어 보여주며 소회에 잠겨있다. 열혈 낚시인이기도 한 한기덕 선생은 가거도와 추자도, 멀게는 하와이까지 낚시를 다니며 어탁용 물고기를 직접 구해오곤 했다.

 

 

직접을 간접처럼 떠내는 마술사  
한기덕 선생은 우리나라 어탁계를 대표하는 고수다. 특히 직접어탁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보유한 장인(匠人)이다. 간접어탁을 섬세하고 깔끔한 여성미로 표현한다면, 직접어탁은 다소 거칠어도 힘과 패기가 넘치는 남성미로 표현된다.
두 방식은 작업 방법도 다르다. 간접어탁은 어체에 화선지를 덮은 후, 물감을 묻힌 솜방망이로 화선지를 두들겨 가며 윤곽을 잡는다. 부위별 체색에 맞춰 솜방망이를 교체하며 차분히 작업할 수 있어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다.
반면 직접어탁은 어체 표면에 물감을 바로 칠한 후 화선지를 덮어 손으로 눌러 찍어낸다. 당연히 간접어탁보다 거친 느낌이 난다. 이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 직접어탁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기덕 선생의 직접어탁은 간접어탁만큼 정교하면서 무게감까지 갖췄다는 게 어탁 애호가들의 말이다. 그래서 한기덕 선생에게 어탁 작업을 부탁한 낚시인 중에는 작업이 끝난 어탁을 받아들고는 간접인지 직접인지 헷갈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 역시 한기덕 선생에게 붕어 어탁을 처음 부탁드렸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2005년 여름 무렵, 부여 천보리지에서 올린 35cm 월척을 댁에 갖다 드린 후 며칠 뒤 우편으로 어탁을 받았다. 검은 먹물로 찍혀 나온 월척 붕어의 거칠고 마초적 분위기를 기대했던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품이 너무나 곱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건 간접이 아니라 직접인데…’   
왜 간접으로 어탁을 뜨신 것인지 궁금해 한기덕 선생에게 전화를 드리자 뜻밖의 답변이 들려왔다.
“허허허 그 어탁은 간접이 아니라 직접으로 뜬 것이요. 겹치기로 한 마리를 연하게 떠서 나란히 배치하니 너무 유해서 간접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어탁은 내가 본 직접어탁 중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한기덕 선생의 마술과도 같은 표현력에 혀를 내둘렀던 순간이었다. 

 

국회의원 비서, 감사원 거친 엘리트 낚시인        
한기덕 선생은 1932년 경남 함안군 함안면 봉성동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변호사를 하던 작은 아버지가 전북경찰총장으로 부임하면서 잠시 고향 함안을 떠나 전북 북중학교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후 다시 함안으로 돌아와 함안고등학교를 졸업한다.
낚시는 초등학생 때 사촌 형님이 개울에서 뱀장어를 낚시로 낚는 것을 본 후 빠져들었다. 중학생 때는 웬만한 어른 못지않게 낚시를 자주 다녔는데 중학생 때 함안군 여항면에 있는 여항저수지(봉성지)에서 생애 첫 4짜를 낚을 정도로 낚시에 열성이었다.
한기덕 선생의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다. 당시 큰아버지와 고모부가 의사였던 점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의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변호사를 하던 작은 아버지 밑에서 사무장을 하다가 1960년 7월, 작은 아버지가 고향 함안에서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비서(지금의 보좌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국회의원 비서만 되도 이른바 ‘끝빨’이 대단했다. 관공서 공무원을 만나도 국장급을 바로 대면했고 민원 해결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올 때도 비서 한기덕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낚시를 다닐 수 있었는데 그의 나이 서른이 채 못 됐을 때다.
그러나 1961년에 5.16 쿠테타가 터져 국회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1년 만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후 1년 정도 무직으로 놀며 실컷 낚시를 다니다가 1962년에 공무원 시험을 치러 그 어렵다던 감사원에 취직하게 된다.
당시 감사원 끝빨은 국회의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국회위원이 기차를 타려면 반드시 돈을 내야 했지만 감사원 직원은 신분증 제시만으로 공짜 표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주재의 초도순시(지금의 지방장관회의) 때도 국회위원들은 회의장 입구에서 몸수색을 받았지만 감사원 직원은 바로 회의장으로 입장했다고 한다. 감사원은 1967년까지 다니다가 퇴직했다.  

 

국내 최초로 어탁 비디오 제작
한기덕 선생이 가장 활발하게 어탁 활동을 한 시기는 1980년경부터다. 당시는 대어 기록을 인증할 수단으로 어탁이 유일하다보니 어탁에 대한 일반 낚시인들의 관심도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한기덕 선생의 직접어탁 솜씨는 세간에 소문이 났고 돈을 주고 어탁을 의뢰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어탁만으로는 먹고 살만한 돈을 만질 수 없었다. 어탁을 판매해 번 돈은 그가 낚시를 즐기고 어탁 재료를 구입하는 밑천이 됐다.
국회위원 비서와 감사원까지 다닌 사람이 어탁에 미쳐 있는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한기덕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의 인생 절반은 낚시였고 또 다른 절반은 어탁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1981년에는 서울 명동의 미도파백화점 내 화랑에서 어탁전시회도 열었다. 일반 미술가가 아닌 어탁가의 작품을 화랑에 전시한 것 역시 최초의 사례였다. TV 방송은 물론 중앙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신문 등에도 한기덕 선생의 어탁 세계가 소개됐으며 1988년 무렵에는 국내 최초의 어탁 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들어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어탁에 대한 낚시인의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 디카로 찍은 계측 사진이 어탁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 도중 낚은 월척을 자랑하는 한기덕 선생. 아흔을 코앞에 둔 고령임에도 녹슬지 않은 낚시 실력을 발휘하고 계셨다.

어탁가 한기덕 선생을 소개한 1994년 4월의 스포츠서울 기사.

돌돔 직접어탁. 손으로 화선지를 눌러 뜨는데도 몸체의 깨알 같은 비늘까지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한기덕 선생이 산천어의 몸에 물감을 칠하고 있다.

한기덕 선생의 애장품 중에 하나인 산천어 어탁.

운동감을 살려 뜬 학공치 군영(群泳) 어탁.

1988년 무렵 어탁 비디오 제작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당시 충주호 청풍에 있는 민박집에 이틀간 머물며 비디오를 제작했다.

한기덕 선생이 1990년대 중반에 완성한 붕어 유영도 병풍. 어탁 비율에 맞는 씨알의 고기를 직접 낚고 작업을 완성하는 데까지 3년이 걸렸다.

명인낚시터에서 만난 고향 선후배들. 뒷줄 우측이 한기덕 선생의 외조카이자 명인낚시터 대표인 김정민 씨, 좌측이 김정민 씨의 동창인 안영권 씨로 세 사람은 합천에서 자주 낚시를 다녔다.

 

 

기록 인증 수단 아닌 예술작품으로 바라봤으면
10년 전만해도 한 달에 서너 건씩 들어오던 어탁 의뢰가 한두 건으로 줄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는 1년에 대여섯 건 밖에는 의뢰가 없다고 한다.
어탁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 서운하지 않느냐의 물음에 한기덕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어탁이 낚시인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히고 있다는 건 솔직히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탁 관련 모임이나 동호회가 존재하고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나가고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어탁은 직접이건 간접이건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바람이라면 어탁을 단순히 기록 인증 수단이 아닌 예술 작품으로 보는 시각이 넓어졌으면 합니다. 어탁은 충분히 후세들에게 전수해줄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죠.”
인터뷰를 마친 한기덕 선생은 예정된 철수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대를 접고 귀가를 준비했다. 일찍 짐을 싼 이유를 묻자 갈수록 눈이 어두워지고 손이 느려져 남들보다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민폐만 끼친다는 것. 마저 즐기지 못한 밤낚시의 손맛은 아직 완성 못한 쏘가리 어탁을 마무리하며 즐기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한기덕 선생은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의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지난 2016년에 부인 최봉금 여사가 돌아가신 후 4년 째 낚시와 어탁으로 소일하는 중이다.
연세가 있다 보니 운전도 불가능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낚시를 다니는 것도 힘든 상황. 다행히 선생의 처지를 아는 의로운 낚시인들이 집까지 차를 몰고 와 종종 출조에 동행하고 있다.
내후년이며 아흔을 앞둔 한기덕 선생은 어탁 속의 물고기를 볼 때마다 정겹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비록 녀석들은 죽어서 어탁을 남겼지만 자신의 손을 거쳐 다시 생명을 얻었다는 게 한기덕 선생의 말이다.
“나는 늘 꿈을 꿉니다. 어탁 속 물고기들이 밤이 되면 자유롭게 뛰쳐나가 헤엄치다가 날이 새면 다시 어탁 속으로 돌아오는 꿈이지요. 그래서 어탁을 뜰 때는 늘 혼을 담아 뜨고 있습니다.”      
한기덕 선생 연락처 010-2383-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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